VIP 접대를 여기에서

일산명월관요정. 이 이름을 꺼낸 건 1월 14일이었다. 화요일 오전 10시 17분. 본부장이 내선을 눌렀다. "야 김 과장, 잠깐 올라와." 올라갔더니 본부장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볼펜을 돌리면 큰일이다. "다음 주 목요일 저녁, 회장님 모시고 식사 잡아." 회장님. K그룹 회장님. 우리 회사 매출의 34%를 차지하는 거래처의 그 회장님.

엘리베이터에서 손바닥이 젖어있는 걸 봤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굴렸다. 호텔 한식당. 지난 분기에 갔다. 서울 S호텔인데 회장님이 "여긴 항상 똑같아"라고 하셨다는 본부장 전언. 탈락. 고급 일식. 회장님이 날생선을 안 드신다. 탈락. 이탈리안. 60대 회장님한테 파스타를 드리냐. 말이 되냐. 중식. 지난달 김 전무 환송식에서 했다. 탈락.

수요일까지 세 군데를 뒤졌는데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목요일 점심을 못 먹었다. 금요일 새벽 2시에 침대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와이프가 "자" 했는데 못 잤다. 이 상무한테 토요일 아침에 전화했다. 이 상무는 이 바닥에서 접대의 신이라 불리는 인간이다. "상무님, 죄송한데 혹시 회장님 모실 만한 데 아시는 곳 있나요. 진짜 급해요."

이 상무가 3초 만에 대답했다. "일산에 명월관 가봐. 우리 사장님 거기서 모셨는데 다음 날 직접 전화 오셨어. 어디냐고." 일산명월관요정. 바로 검색했다. 전통 한정식. 독립된 방. 가야금 라이브. 사진을 보는데 손이 떨렸다 약간. 이거다 싶었다. 호텔이 아니고 식당도 아닌 어떤 제3의 공간. 회장님이 처음 보시는 장르의 장소. 이게 필요했다.

월요일 오전에 전화를 걸었다. VIP 접대라고 하니까 담당자가 연결됐다. 메뉴 구성, 좌석 배치, 회장님 자리는 어디가 좋은지, 주차는 어디에 하면 동선이 짧은지, 공연 시간은 코스 몇 번째 이후가 적절한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체크리스트처럼 물어왔다. 꽃 장식 가능하냐고 했더니 된다고. 어떤 꽃을 원하시냐고. 그때 알았다. 여긴 식당이 아니라 작전을 같이 짜는 곳이구나.

수요일에 사전 답사를 갔다. 퇴근하고 7시에 도착했다. 방을 봤다. 넓었다. 족자가 걸려 있었고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났다. 조명이 따뜻했다. 회장님 자리를 정했다. 문에서 제일 안쪽, 정면에 족자가 보이는 자리. 이건 이 상무가 가르쳐준 건데, 윗사람은 입구에서 제일 먼 자리에 앉혀야 한다. 뭐 당연한 건데 막상 현장에서 확인 안 하면 당일에 헤맨다.

목요일. D-day. 아침에 양복을 세 벌 꺼내놓고 고르다가 짙은 회색으로 갔다. 넥타이는 남색. 너무 튀면 안 되고 너무 평범해도 안 된다. 6시에 도착했다. 식사는 7시인데. 테이블 위에 주문한 꽃이 놓여 있었다. 흰 국화와 연보라색 꽃인데 이름은 모르겠다. 깔끔했다. 좌석 확인하고, 화장실 위치 확인하고,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동선을 두 번 걸어봤다.

6시 48분. 본부장이 먼저 왔다. 방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이 사람의 "괜찮네"는 "잘했다"라는 뜻이다. 2년 밑에서 일하면 안다.

7시 3분. 회장님 차가 도착했다. 검은색 제네시스. 기사분이 문을 열었다. 회장님이 내리셨다. 감색 캐시미어 코트. 입구에서 안내를 받으시면서 방까지 오시는 동안 걸음이 느리셨다. 두리번거리셨다. 들어오시자마자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시더니. "오. 여기 좋네."

이 세 글자. "여기 좋네." 일주일 동안 내 위장을 쥐어짜던 모든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줄 알았다.

코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복죽. 회장님이 한 숟가락 드시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말씀은 없으셨다. 이 세대 분들은 고개 끄덕임이 말보다 무겁다. 모둠 회가 나왔을 때 된장 소스를 찍어 드시고 "어 이거 괜찮다"라고 하셨다. 갈비찜. 한 점 드시더니 본부장을 보시며 "이 집 잘하네." 세 번의 반응. 접대에서 상대가 음식에 대해 세 번 입을 여는 건 대성공이다. 보통은 한 번도 안 한다.

본부장이 나를 슬쩍 봤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나는 정종잔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려서 무릎 위에 올려놨다.

가야금 공연이 시작됐다. 연주자가 방 안에 들어오시는 순간 회장님이 자세를 고쳐 앉으셨다. 첫 음이 울리자 회장님이 눈을 감으셨다. 감으셨다. 이건 좋다는 뜻인지 싫다는 뜻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근데 한 곡이 끝나고 회장님이 직접 박수를 치셨다. 두 번. 짝짝. 그리고 말씀하셨다. "요즘 이런 데 없어." 본부장이 나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눈이 웃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말했다. 너 진급한다.

정종을 따라 올렸다. 작은 잔에. 회장님이 받으시더니 내 잔에 직접 따라주셨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직접 술을 따르는 건. 그건 인정이다. "고맙습니다"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녹았다. 비즈니스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회장님이 먼저 꺼내셨다. "올해 같이 좀 해봅시다." 이 한마디를 위해 일주일을 못 잤다.

나가실 때. 현관에서 코트를 입으시면서 회장님이 나를 보셨다. 본부장 뒤에 서 있는 나를. "김 과장, 명함 하나 줘." 직접. 나한테. 과장한테. 본부장 앞에서. 명함을 드리는데 손이 떨려서 두 손으로 드렸다. 회장님이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시면서 "다음에 또 여기로 잡아" 하셨다.

장소가 만든 거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이 공간이, 이 음식이, 이 음악이 딱딱한 접대를 한 끼의 편한 식사로 바꿔놨다. 그 차이가 "올해 같이 좀 해봅시다"를 끌어냈다.

차 안에서 본부장이 전화했다. "김 과장, 수고했어." 끊고 나서 혼자 운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해서 창문을 열었다. 일산 바람이 차가웠다. 1월이니까. 근데 그 차가운 게 좋았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접대 장소 고민하는 사람한테 하나만. 반드시 사전에 가봐라. 방 크기, 화장실까지 동선,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몇 걸음인지. 당일에 처음 가면 반드시 허둥댄다. 그리고 메뉴는 미리 정해놔라. 당일에 고르면 어수선해진다. 회장님급이 어수선한 걸 싫어한다는 건 다 아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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