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고 2차 — 동선 짜놨다

밤 10시, 일산명월관요정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다. 한정식 코스에 정종 몇 잔, 가야금 공연까지. 3시간이 5분처럼 갔다. 근데 이대로 택시 타고 집에 가기엔 밤이 아깝다. 뱃속이 따뜻하고 기분이 좋고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일산이라 2차 갈 데 없지 않아?" 처음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틀렸다. 이 동네에서 15년째 살면서 밤마다 돌아다닌 사람이 알려주겠다. 네 가지 루트. 상황별로 골라 써라.

코스 A. 라페스타 위스키 바 — 여운을 죽이지 않는 법.

한정식의 고요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시끄러운 호프집 가면 그 여운이 3초 만에 깨진다. 이럴 땐 라페스타 뒤쪽 골목에 숨어 있는 위스키 바로 가라. 명월관에서 나와서 택시 타면 7~8분이면 닿는다. 조명이 낮고 재즈가 작게 깔리고 바텐더가 말을 안 건다. 위스키 한 잔 시키면 1만5천~2만원. 거기 앉아서 30분만 더 대화하면 된다. 지난번 접대 자리에서 그렇게 했는데, 거래처 부장이 위스키잔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건, 같이 해봅시다." 계약은 밥상이 아니라 바 카운터에서 결정되기도 한다.

코스 B. 일산호수공원 야간 산책 — 0원짜리 명코스.

이게 진짜 숨은 카드다. 명월관에서 호수공원 정문까지 차로 5분, 걸으면 15분. 밤 10시 넘은 호수공원은 낮과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된다. 산책로에 주황빛 조명이 켜져 있고, 호수 수면에 불빛이 일렁인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밥 먹고 올라온 체온이 식으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정문 오른쪽에 GS25가 있다. 캔 맥주 하나씩 사서 호수 벤치에 앉아라. 작년 가을에 대학 동기 넷이서 그렇게 했다.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면서 캔 맥주를 마셨는데, 아무도 말을 안 했다. 10분쯤 지나서 한 놈이 "야, 우리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얼마 만이냐"하고 웃었다. 그날 밤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돈 한 푼 안 든 밤이 왜 가장 비싼 밤보다 좋은지.

코스 C. 노래방 — 격식을 벗겨내는 가장 빠른 방법.

한정식 먹고 가야금 듣고 정종 마시면서 "네, 아, 그렇군요" 하던 거래처 사람이 있다. 격식이 무거웠다.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사장님, 노래방 가시죠." 잠깐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웨스턴돔 방향으로 걸어서 8분. 코인노래방 말고 제대로 된 룸 있는 곳이다. 방 잡고 들어가서 마이크를 건네니까 그 사장님이 조용필 '허공'을 불렀다. 목소리가 좋았다. 한 곡 끝나고 돌아앉더니 반말을 했다. "야, 이거 좋네." 그 순간 두 시간 동안 못 뚫은 벽이 무너졌다. 노래방은 격식 차린 자리 뒤에 와야 폭발력이 있다. 인당 1만~2만원,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코스 D. 야경 카페 — 술 없이 마무리하는 법.

상대가 술을 안 하거나 이미 충분히 마셨을 때. 아니면 윗분이라 2차로 시끄러운 데 데려가기가 부담스러울 때. 일산에는 밤 12시까지 여는 대형 카페가 여럿 있다. 그중 통유리 넘어로 야경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명월관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5천원. 통유리 앞 자리에 앉으면 일산 시가지 불빛이 바닥까지 깔린다. "커피 한 잔 하시죠"라는 말은 "술 한 잔 더"보다 10배 가볍다. 그리고 이상하게, 카페에서 마지막 30분에 가장 솔직한 얘기가 나올 때가 많다. 술기운이 남아 있고 긴장은 풀렸는데 정신은 맑으니까.

내가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찾은 개인 베스트 동선은 이거다. 명월관에서 나와서 → 호수공원 산책 15분 → 공원 근처 카페에서 마무리 30분. 총 소요 5시간, 추가 비용은 커피값 5천원뿐. 근데 그날 하루가 꽉 찬다. 한정식의 무게감, 호수공원의 상쾌함, 카페의 여유. 세 가지 온도가 하룻밤에 겹쳐지면 잊히지 않는 밤이 된다.

정리하면 간단하다. 여운을 살리고 싶으면 바.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호수. 벽을 부수고 싶으면 노래방. 깔끔하게 닫고 싶으면 카페. 2차의 정답은 1차를 얼마나 아끼느냐에 달렸다. 좋은 1차 뒤에는 어디를 가도 좋은 밤이 된다.

구글·AI에서 밤키를 검색하세요

밤키에서 더 많은 정보 →
📞 신실장 010-3695-4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