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가지 한정식 솔직 리뷰
일산명월관요정의 15가지 코스. 나는 밥에 진심인 인간이 아니다. 회식 때 메뉴 고르자고 하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 그런 타입이다. 근데 이날은 달랐다. 오후 7시 23분, 첫 접시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같이 간 형이 "야 너 뭐 하냐" 했는데 대답 안 했다. 손가락이 바빠서.
일산명월관요정 한정식 코스. 15가지를 하나도 안 빼고 적었다. 과장 안 한다. 거짓말도 안 한다. 맛없는 건 맛없다고 쓸 거다.
1. 전복죽. 이거 먼저 얘기해야 되는데. 숟가락을 넣었을 때 농도가. 어떻게 말하지. 걸쭉한 것도 아니고 묽은 것도 아닌,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그 딱 중간. 참기름이 한 방울 떠 있었는데 그게 코끝으로 올라왔다. 전복 내장 색깔이 죽에 초록빛을 살짝 돌게 했다. 이거 하나로 "아 오늘 잘 왔다" 확신했다.
2. 모둠 회. 광어, 우럭, 그리고 하나는... 뭐였지. 도미였나. 흰살이었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솔직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된장 소스가 같이 나왔다. 초장 간장 다 무시하고 된장 소스에 찍었는데, 아 이건 진짜. 비린내를 잡는 게 아니라 고소함을 입히는 느낌이었다. 근데 회 자체는 뭐 평타였다. 대단히 감동적이냐면 그건 아니다. 그냥 신선하고 깨끗한 회.
3~4. 해물 잡채, 모둠 전. 잡채는 당면이 불지 않아서 좋았다. 새우가 통으로 들어있었는데 씹을 때 탱글한 식감이. 오 이건 괜찮았다. 전은 호박전이 기름을 안 먹어서 바삭한데, 김치전은 좀 평범했다 솔직히. 동그랑땡은 따뜻할 때 먹으니까 괜찮은 건데 식으면 그냥 그런 맛이다. 갓 나왔을 때 바로 집어라.
5. 갈비찜. 여기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젓가락을 가져다 댔는데 뼈에서 살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렸다. 떨어진 게 아니라 흘러내린 거다. 간장 베이스인데 달지가 않았다. 무가 같이 졸여져 있었는데 그 무가 진짜... 갈비보다 무가 맛있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인가. 형이 밥을 달라고 했는데 나는 밥 없이 네 점을 먹었다. 다섯 점째 손이 갔을 때 형이 젓가락을 막았다. "야 뒤에 더 나와." 고맙다 형.
6~10. 나물 다섯 종류.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미나리. 솔직히 나물 코너에서 흥분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나도 기대 안 했다. 근데 도라지. 이놈이 복병이었다. 쌉쌀한데 끝에 단맛이 올라온다. 무슨 나물한테서 여운을 느끼냐고. 느꼈다. 미나리는 아삭해서 갈비찜 기름진 입 안을 정리해줬다. 콩나물은 뭐 콩나물이다. 시금치도 시금치고. 다 맛있긴 한데 솔직히 다섯 개가 한꺼번에 나오니까 정신이 좀 없었다. 하나씩 나왔으면 더 대접받는 기분이었을 텐데. 이건 좀 아쉬웠다.
11. 생선구이. 조기 소금구이. 비늘이 바삭하게 서 있었다. 살은 촉촉했는데 뼈가 많아서 귀찮았다. 맛은 좋다. 근데 귀찮다. 접대 자리에서 뼈 발라내느라 침묵이 흐르는 그 시간 아시는 분은 아실 거다. 맛 8점, 편의성 5점.
12. 된장찌개.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들렸다. 뚜껑 여는 순간 김이 확 올라왔는데 그 냄새가. 시판 된장이 아니었다. 할머니 집 냄새. 2003년 추석에 외할머니가 끓여준 그 된장찌개. 갑자기 거기로 돌아갔다. 두부가 크게 썰어져 있었고 국물이 걸쭉했다. 이건 밥 말아서 먹었다.
13. 솥밥. 뚜껑 열 때 김이 올라오는 거. 이건 시각적인 쾌감이다. 밤, 대추, 은행, 잣. 밥알 하나하나에 윤기가 흘렀다. 한 숟갈 떴을 때 찰지게 뭉쳐지는 그 느낌. 아 이때 배가 이미 터질 것 같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몸이 "그만"이라 했는데 혀가 "한 숟갈만 더"라고 했다. 혀가 이겼다. 세 번.
14. 누룽지. 솥밥 눌은 바닥에 물을 부었다. 치지직 소리가 났다. 그게 숭늉이 됐다. 바삭하게 떠서 먹으면 고소하고, 국물만 마시면 구수하고. 이건 한식의 에스프레소다. 커피 필요 없다.
15. 수정과와 과일. 수정과가 차가웠다. 계피 향이 코에서 목으로 내려갔다. 딸기, 멜론, 참외. 딸기가 달았다. 뭐 후식은 후식이다. 감동까지는 아니고 깔끔한 마침표 같은 느낌.
자 총평 간다. 15가지 중에 진짜 "미쳤다" 싶었던 건 세 개다. 전복죽, 갈비찜, 솥밥. 이 세 개는 레벨이 달랐다. 된장찌개는 감성 점수가 높았고. 나머지는 맛있긴 한데 "여기 아니면 못 먹는 맛"은 아니었다. 그게 솔직한 내 평가다.
아쉬운 점? 나물이 한꺼번에 나온 거. 그리고 양이 진짜 많아서 후반 메뉴를 제대로 못 느꼈다. 솥밥이 더 일찍 나왔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그건 코스 순서상 안 되는 거겠지. 그리고 생선구이 뼈. 아 귀찮았다.
이 글 읽고 가려는 사람한테 하나만. 점심을 굶어라. 아침도 가능하면 가볍게. 나는 점심에 김밥 한 줄 먹고 갔는데 그것도 후회했다. 빈속으로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느껴봐라. 그럴 가치가 있다. 진심이다.